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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처음 이 영화를 볼 때 단순한 추격 액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마음 한쪽이 묵직하게 눌리는 느낌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습니다. 나홍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추격자’는 연쇄살인범을 눈앞에 두고도 조직 논리와 절차에 갇혀 버린 경찰 시스템을 냉정하게 해부하는 영화입니다. 범인보다 오히려 시스템이 더 무섭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범죄 스릴러의 공식을 비튼 배경과 맥락
영화 속 연쇄살인범 지영민은 기존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냉철하고 지능적인 사이코패스(Psychopath)와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여기서 사이코패스란 공감 능력 결여와 반사회적 행동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 장애를 의미하는데, 보통 영화에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지영민은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고, 대화의 맥락조차 제대로 따라오지 못합니다. 경찰 조사 중에 살인을 담담하게 자백하면서도 결정적인 질문 앞에서는 입을 닫습니다. 이 평범한 외양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실제 서울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단순한 장르 오락물이 아니라 사회 구조를 향한 날 선 질문으로 기능한 작품이었기에 가능한 성적이었다고 봅니다.
- 지영민: 기존 사이코패스 클리셰를 벗어난 즉흥적이고 감정 통제 불능의 살인자
- 엄중호: 파면된 전직 형사 출신으로, 출발점은 돈이었지만 점점 감정이 개입되는 인물
- 실제 사건 모티프: 현실 기반의 서사가 극의 공포감을 배가시키는 요인
연쇄살인보다 무서웠던 시스템의 공백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답답하게 느낀 장면은 사실 지영민의 살인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범인을 눈앞에 두고도 경찰 조직이 엇갈린 방향으로 움직이는 파출소 장면들이 오히려 더 불편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혹시 그 장면에서 같은 감정을 느끼신 적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영화 안에서 경찰은 영장 없이 잡아 둔 피의자를 12시간 안에 검사 승인을 받지 못하면 풀어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영화는 이 제도적 시계를 극적 긴장감의 축으로 활용합니다.
그런데 그 골든타임(Golden Time), 즉 피해자를 살릴 수 있는 결정적 시간 안에 경찰이 한 일은 서울시장 인분 테러 사건 수습이었습니다. 골든타임이란 사건 발생 직후 구조나 수사가 이루어져야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뜻하는데, 이 영화는 그 시간이 조직 이해관계에 의해 얼마나 쉽게 낭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가 이 대목을 보면서 느낀 건 분노보다 가까운 무력감이었습니다.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봐야 할 이유
중호가 미진의 딸 은지를 마주하고 브라질에 아빠가 있다는 거짓말을 들으면서 표정이 달라지는 장면, 마지막에 미진의 음성 메시지를 듣고 무너지는 장면은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서사를 통해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인-미디아스-레스(In Medias Res) 방식의 도입부, 즉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구성도 다시 보면 더 잘 들어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하정우의 추격 신은 화려한 스턴트보다 실제 체력 한계를 드러내는 현실감으로 승부하는데, 그 헛구역질과 넘어짐이 오히려 장면의 설득력을 높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추격자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인가요?
A. 직접적인 실화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서울에서 발생한 실제 연쇄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맞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 공포가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Q. 지영민이 이렇게 오래 잡히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A. 영화 안에서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피해자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여성들이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경찰 조직이 사건의 본질보다 조직 이해관계를 먼저 챙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민은 과거에도 두 차례 살인을 자백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난 전력이 있었습니다. 이 설정이 제일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Q. 슈퍼 아주머니 장면이 왜 그렇게 논란이 됐나요?
A. 단골손님인 영민을 끝까지 의심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강력 범죄 가해자 주변 사람들이 "평소에 정말 순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완전히 허황된 설정은 아니라는 시각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Q. 엄중호가 진짜 히어로라고 볼 수 있나요?
A. 영화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출발점이 미진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돈이었다는 점, 과거 부패 경찰이었다는 이력이 줄곧 따라붙습니다. 다만 서사를 통해 감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악인도 단순한 영웅도 아닌 인물로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추격자를 다시 들여다보고 나서 제가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범죄 스릴러의 긴장감으로 보고, 두 번째엔 시스템 비판으로 읽히고, 세 번째엔 인물들의 내면 변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한 번 보고 끝내기엔 아까운 영화입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 사회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는가. 골든타임을 낭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바뀌었는가. 저는 이 영화를 본 뒤 한동안 그 질문을 안고 살았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단순한 스릴러가 아닌 사회적 시선을 갖고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