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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개봉 전에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이야기를 몇 번 읽었거든요. 1년째 육아휴직 중이라 간만에 혼자 극장 의자에 앉은 날, 큰 기대 없이 스크린을 바라봤는데 — 결과적으로 그 2시간은 올해 제가 극장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블랙 코미디가 건드린 것들 — 영화 디거의 구조와 설정
영화 <디거>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연출했습니다. <레버넌트>와 <버드맨>을 만든 바로 그 감독이죠. 저는 특히 <버드맨>을 좋아해서 이냐리투 감독의 이름만으로 어느 정도 신뢰를 갖고 있었는데, <디거>는 그 신뢰를 충분히 돌려받은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 디거 록웰은 미국 최고의 석유 재벌 가문 3대째 수장입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석유 시추 사업을 이어받아, 알래스카와 그린란드 일대에서 굴착 작업을 벌이는 인물이에요. 톰 크루즈가 특수 분장으로 이 인물을 연기하는데, 뱃살과 백발로 무장한 모습이 스크린에 처음 등장했을 때 제가 직접 봤는데 극장 안이 실제로 한 박자 술렁였습니다.
이 영화의 장르는 블랙 코미디(Black Comedy)입니다. 블랙 코미디란 죽음, 재난, 권력 부패처럼 무겁고 끔찍한 소재를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냉소적으로 그려내어 사회를 비판하는 장르를 말합니다. <돈 룩 업>과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고 보시면 이해가 빠릅니다.
초반 시퀀스에서 그린란드 시추 시설 담당자가 메탄가스 누출과 빙하 균열을 보고하자, 디거가 "내 책상보다 덜 벌어진 빙하 때문에 시추를 멈추란 거야?"라고 일축하는 장면은 코미디인데도 웃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경험상 이런 장면에서는 어이없어서 웃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엔 그냥 서늘했어요.
결국 통화가 끝나기도 전에 시추 시설이 폭발하고, 워싱턴의 8배 크기에 달하는 빙하 덩어리가 그린란드에서 분리되어 유럽을 향해 흘러갑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디거의 자택 응접실에 모여 긴급 대책 회의를 여는데, 거기서 튀어나온 아이디어가 "빙하에 파이어버드 미사일을 쏘아 맞추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1년간 딸을 키우며 쌓아온 어떤 막막함과 겹쳐져서 가슴이 싸해졌습니다.
여기서 이 영화의 핵심 구조가 등장합니다. 액자식 구성(Frame Narrative)이 그것입니다. 액자식 구성이란 하나의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되는 서사 방식으로, 쉽게 말해 '극 중의 극' 구조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무대 조명이 꺼지고, 두 캐릭터가 연기를 멈추며 "잠깐 쉬자"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모든 장면이 실제 사건이 아니라, 과거의 환경 재난을 소재로 한 연극의 리허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죠.
디거 록웰은 실제 인물이고, 그 인물을 연기하는 베테랑 연극배우 커티스가 진짜 주인공입니다. 커티스는 리허설 도중 딸이 탄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받습니다. 그 상황을 안고 다음 막을 준비하는 커티스의 모습은 코미디로 시작한 이 영화에 생각지 못한 균열을 냅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풍자 오락물이 아니라는 신호였습니다.
- 장르: 블랙 코미디 — 환경 재난을 냉소적 웃음으로 비판하는 방식
- 액자식 구성 — 현실처럼 펼쳐지다가 연극 리허설 현장임이 밝혀지는 구조
- 톰 크루즈의 특수 분장 — 극 중 실제 나이와 불과 서너 살 차이 수준의 완성도
- 리즈 아메드가 연기한 가네시 박사 — 인종 차별과 과학 무시를 동시에 받는 캐릭터
- 이냐리투 감독 전작 <버드맨>과 맥락을 공유하는 현실·허구의 혼용 방식
톰 크루즈의 연설, 그리고 이 영화가 찌르는 곳
이 영화의 절대적인 백미는 후반부 연설 장면입니다. 환경 운동가, 시민단체 대표, 각국 외교관 수백 명이 가득 찬 그리스 원형 회의장 같은 공간 한가운데, 버건디색 양복을 입은 디거 록웰이 등장해 일방적으로 폭주합니다.
대사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요지를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내가 석유를 캐는 이유는 너희가 원하기 때문이다. 더 빠른 스마트폰, 유튜브, SNS — 그 모든 것에 석유가 들어간다. 환경이 죽는다고 외치면서 편리함은 한 치도 포기하지 못하는 위선자들이 나보고 손가락질을 한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스크린으로 보면서 느낀 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말이 다 맞거든요.
이 스피치의 무서운 점은 화자가 악당이라는 것입니다. 논리 자체는 맞지만, 그것을 자기 면죄부로 사용하는 방식이 철저히 악의적입니다. 이 장면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극장에 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영화에서 단독 스피치 장면을 꽤 많이 봐왔다고 자부하는데, 이 시퀀스는 그 경험의 바깥에 있었습니다.
다만 이 영화를 마냥 찬사로만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충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마어마한 전기와 자본을 소비하며 만들어진 할리우드 초거대 상업 영화가, 돈을 내고 극장에 앉은 관객을 향해 "너도 공범이다"라고 삿대질하는 구조는 다소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메시지가 옳더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현학적(학식을 자랑하며 상대를 가르치려 드는 태도)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죠. 실제로 해외 반응을 찾아보면 "오만하고 과잉되어 있다"는 지적이 꽤 눈에 띕니다. 저는 그 지적이 이해된다고 봅니다.
두 번째 아쉬움은 초반 권력자 묘사입니다. 재난 앞에서도 자기 종양 수술만 걱정하는 대통령, 빙하에 미사일을 쏘자는 장관 — 이 캐릭터들은 코미디로서는 기능하지만, 이미 비슷한 포맷의 풍자 영화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스테레오타입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돈 룩 업>을 본 관객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과 촬영은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디거가 바다에 뛰어드는 최후 장면에서 실제 바다와 무대 세트의 경계를 교묘하게 뒤섞는 방식은, 화면을 보면서 제가 직접 "이게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 세트인지 모르겠다"는 감각을 갖게 했습니다. 그 혼돈이 의도된 것이라는 게 더 무서웠어요.
결말에서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이 지나가는 순간, 객석에서 방독면(호흡기 유해 물질 차단을 위한 안면 보호 장구)을 꺼내 착용하고 물이 차오른 대도시로 걸어 나가는 군중의 모습은 시각적 압박의 정점이었습니다. 그 장면에서 제 딸 생각이 났습니다. 이 세계를 그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요. 극장 의자 손잡이를 꽉 쥐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후 위기와 관련된 과학적 근거는 점점 쌓이고 있습니다. 출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 기온은 이미 1.1°C 이상 상승했으며, 이 추세가 지속될 경우 빙하 붕괴와 해수면 상승은 영화 속 설정이 아닌 현실이 됩니다. <디거>가 과장된 풍자처럼 보이지만, 그 과장 안에 실제 데이터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 영화의 불편함은 단순한 오락적 자극이 아닙니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 인간의 활동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이산화탄소 환산량으로 표현한 수치)에 대한 논의도 이 영화를 둘러싼 아이러니 중 하나입니다. 출처: Sustainable Screen Arts 같은 단체들은 영화 제작 현장의 탄소 배출 저감을 꾸준히 촉구하고 있는데, 이냐리투 감독 역시 이 모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점은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만들어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디거,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던데 실제로 어떤가요?
A. 제가 직접 보고 나서 말씀드리면, 블랙 코미디 장르 특성상 웃기면서 불편한 감정이 동시에 오는 영화입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다소 강압적이라고 느끼는 분들도 있고, 그 날카로움이 오히려 통쾌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다만 미술과 연기의 완성도는 호불호 이전의 문제로, 어떤 쪽이든 이 두 가지는 인정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Q. 액자식 구성이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요?
A. 액자식 구성이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는 구조인데, <디거>에서는 갑작스러운 조명 전환과 배우들의 대화로 비교적 명확하게 전환점을 알려줍니다. <버드맨>을 보신 분이라면 이냐리투 감독 특유의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방식에 이미 익숙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반전이 드러나는 순간 이전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재조합됩니다.
Q. 톰 크루즈 분장이 실제로 얼마나 자연스러운가요?
A. 제가 직접 봤을 때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에는 진짜인지 분장인지 잠깐 판단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특수 분장(SFX Makeup, 실리콘 보조재를 사용해 피부 질감과 체형을 인위적으로 변형하는 기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고, 톰 크루즈의 표정 연기가 그 분장 위에 완벽히 얹혀 있어서 어색함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Q. 기후 위기를 다룬 다른 영화와 비교하면 어떤가요?
A. <돈 룩 업>과 비교하는 시각이 많은데, 저는 <디거>가 좀 더 연극적이고 시각적으로 밀도 있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돈 룩 업>이 대중적인 코미디에 가깝다면, <디거>는 불편함을 더 의도적으로 설계한 느낌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 불편함이 오히려 더 정직하다고 볼 수 있고, 반대로 피로감을 준다는 의견도 유효합니다.
결론
제 최종 판단은 별점 5개 중 4.5개입니다. 연기, 미술, 스케일, 이야기 구조 — 이 네 가지 중 어느 것도 허술하지 않았습니다. 다소 훈계조의 톤과 뻔한 조연 캐릭터라는 명확한 한계는 존재하지만, 그 한계를 고려하고도 남을 만한 영화적 성취가 이 작품 안에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 연설 시퀀스와 방독면을 쓰고 물에 잠긴 도시로 걸어 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극장에서 봐야만 체감할 수 있는 시청각적 경험입니다. 지금 누적 관객이 많지 않다는 게 저는 진심으로 아쉽습니다. 올해 극장에서 꼭 한 편만 봐야 한다면 선택지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두 편의 여유가 있다면 <디거>는 그 자리를 충분히 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