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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 중 아이를 재우고 나서 혼자 영화 한 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뭘 골라야 할지 몰라 스트리밍 화면만 한참 들여다보다 그냥 끄는 날이 꽤 많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고른 게 2008년 개봉작 <과속스캔들>이었고, 보는 내내 제가 왜 이걸 이제야 봤나 싶었습니다. 무거운 소재를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직접 느낀 시청각 카타르시스
잘나가는 라디오 DJ 남현수(차태현)의 아파트에 황정남(박보영)이 아들 황기동(왕석현)을 데리고 들이닥치는 오프닝부터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36살 라디오 DJ에게 갑자기 22살짜리 딸과 여섯 살짜리 손자가 생겨버린다는 설정은, 자칫 막장 드라마의 소재로 흘러갈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형철 감독은 이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를 시종일관 경쾌한 리듬으로 밀어붙이면서 관객이 숨 돌릴 틈 없이 웃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서사 구조란 이야기가 갈등을 쌓고 해소해 나가는 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영화는 그 구조를 코미디와 감동 사이에서 아주 능숙하게 조율했습니다.
제가 직접 극장 스피커로 들었을 때 가장 전율이 일었던 장면은 박보영 배우가 보이는 라디오 공개 경연 무대에서 '아마도 그건'을 부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저런 성량이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성량(vocal volume)이란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크기와 울림의 정도를 뜻하는 음악 용어인데, 박보영 배우의 그 장면은 극장 규모의 음향 시스템을 통해서야 비로소 제대로 전달되는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아역 배우 왕석현의 미장센(mise-en-scène) 활용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배우의 표정·위치·소품 등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의미 전체를 일컫습니다. 화투를 펼치며 썩소를 짓는 황기동의 클로즈업 한 컷이 그 자체로 폭소를 끌어냈던 건, 단순히 아이가 귀여워서가 아니라 감독이 그 장면을 아주 치밀하게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품에 안긴 딸아이 얼굴이 자꾸 황기동과 겹쳐 보여서, 저는 웃으면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상한 상태로 영화를 내내 보았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2008년 국내 누적 관객 수 820만 명을 돌파하며 그해 한국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단순한 흥행 수치를 넘어서, 코미디와 가족 드라마라는 두 장르를 동시에 만족시킨 사례로 지금도 꾸준히 언급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 오프닝부터 끝까지 한 장면도 늘어지지 않는 편집 리듬
- 박보영의 실제 라이브 보컬이 주는 공개 경연 씬의 압도적 몰입감
- 왕석현의 미장센 활용이 만들어내는 비언어적 코미디
- 820만 관객을 동원한 2008년 한국 박스오피스 1위 기록
가족 코미디의 감동 뒤에 남는 서사적 한계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벅찬 감동이 남아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뭔가 미완성된 느낌이 가슴 한켠에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그 감각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어린 미혼모'라는 사회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실제로 어떤 삶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영화가 실제 사회 구조의 문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 작품은 사회적 리얼리즘을 의도하지 않은 오락 영화이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황정남이 22살 미혼모로서 겪었을 경제적 빈곤, 제도적 차별, 사회적 낙인은 영화 안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현실의 미혼모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무겁습니다.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의 자료에 따르면 미혼모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전체 가구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출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영화 속 황정남에게 그런 무게는 없었습니다.
또한 갈등 해소 방식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스캔들이 터질 뻔한 위기가 악덕 기자의 실수나 방송국 국장의 너그러운 배려 한 방으로 무마되는 후반부는, 서사적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 측면에서 상당히 허술하게 처리됩니다. 개연성이란 사건이 인물의 행동과 상황 논리에 맞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정도를 가리키는데, 이 부분에서만큼은 속도감보다 치밀함이 훨씬 더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이 단점들이 작품 전체의 가치를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철없고 이기적이던 남현수가 딸과 손자를 통해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1년간 육아휴직을 하면서 온종일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버겁고도 소중한지를 몸으로 배운 직후에 이 영화를 보았더니, 남현수가 마지못해 할아버지 노릇을 하다가 결국 제 발로 뛰어드는 변화가 그 어떤 대사보다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과속스캔들 지금 봐도 재밌나요? 옛날 영화 아닌가요?
A. 2008년 개봉작이지만 코미디의 호흡이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최근에 다시 봤는데, 오히려 요즘 OTT 드라마보다 편집 속도가 훨씬 경쾌하게 느껴졌습니다. 차태현과 박보영, 왕석현 세 사람의 케미가 워낙 탄탄해서 시간이 지나도 흡인력이 줄지 않습니다.
Q. 박보영이 과속스캔들에서 노래를 직접 불렀나요?
A. 네, 공개 경연 씬에서 부른 '아마도 그건'은 박보영 배우가 직접 라이브로 녹음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신인이었던 배우가 그 성량을 보여줬다는 게 극장에서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이 노래 한 곡이 영화 전체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Q. 아이랑 같이 봐도 되는 영화인가요?
A. 국내 상영 등급은 12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미혼모, 혼전 임신 같은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자극적으로 묘사되지 않아 초등학생 이상 자녀와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기에 오히려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육아 중인 부모라면 영화 보는 내내 아이 생각이 겹쳐서 감동이 배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과속스캔들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국내 주요 OTT 플랫폼 여러 곳에서 서비스 중이지만 제공 여부는 시기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네이버 시리즈온, 왓챠, 웨이브 등에서 검색해 보시면 현재 제공 여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극장 음향에 가까운 환경에서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결론
육아휴직 중 처음 본 이 영화를 지금도 가끔 떠올립니다. 억지 눈물 없이도 가족이라는 말을 이렇게 따뜻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직접 확인한 경험이었습니다. 미혼모 소재를 너무 가볍게 소비했다는 서사적 한계는 냉정하게 지적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한국 가족 코미디의 레퍼런스로 남아 있는 이유는 배우들의 호흡과 감독의 연출이 만들어낸 온도 덕분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가급적 큰 화면과 좋은 스피커 환경을 갖추고 보시길 권합니다. 박보영의 '아마도 그건' 씬은 음질이 좋을수록 전혀 다른 경험이 됩니다. 보고 나서 가족과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