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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포스터만 보면 충분히 기세 있는 영화가 나올 것 같았거든요. 노란 스쿨버스 느낌의 차 안에 가족이 타고 있고, 트렁크에는 8년 전 막내딸을 죽인 살인범이 묶여 있다는 설정.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이 한 화면에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기대치가 꽤 올라갔습니다. 근데 막상 영화관에서 앉아 110분을 다 보고 나오면서 든 생각은 "이 소재, 이 배우들로 왜 이 결과가 나왔지?"였습니다.
포텐셜이 넘쳤던 설정, 실제로 들어가 보니
경주기행은 2025년 8월 26일 개봉한 김미조 감독의 두 번째 장편입니다. 상영 시간 110분,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은 2020년 갈맥으로 데뷔했고, 이번이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영화관에서 봤는데,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기대가 꽤 있었습니다. 엄마 옥실(이정은), 첫째 장주(공효진), 둘째 영주(박소담), 셋째 동주(이연)까지 네 명이 경주로 여행을 떠나는 구조인데, 단순한 여행이 아닙니다. 8년 전 막내딸 경주를 살해하고 최근 석방된 살인범 백상현(변요한)을 납치해 트렁크에 실은 채 이동하는 거죠.
영화 제목 '경주기행'에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경주(지명)로 떠나는 여행이고, 동시에 막내딸의 이름인 '경주'의 길을 따라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행'이라는 단어 역시 단순한 여행을 넘어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뜻하기도 하죠. 이 중의성 하나만으로도 설정의 밀도가 느껴졌습니다. 제 경험상 제목에서 이 정도 함의를 담은 한국 영화가 그리 흔하지 않거든요.
- 개봉일: 2025년 8월 26일 / 감독: 김미조 (갈맥, 2020 데뷔)
- 상영 시간: 약 110분 / 관람 등급: 15세 이상
- 주요 출연: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변요한(노런티 출연)
- 핵심 설정: 막내딸 살해 후 석방된 살인범을 납치해 경주로 복수 여행
블랙코미디라고 했는데, 실제로 웃긴 장면이 있었나
일반적으로 블랙코미디(Black Comedy)라 하면 죽음, 범죄, 폭력처럼 어두운 소재를 역설적으로 유머화해서 긴장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장르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비트는 방식이 핵심이죠. 이 장르가 먹히려면 연출이 소재의 아이러니를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근데 제가 직접 봤을 때 블랙코미디적 쾌감이 느껴진 장면은 솔직히 거의 없었습니다. 재료는 차고 넘쳤어요. 납치한 살인범을 트렁크에 태우고 제삿밥을 먹으며 알리바이용 여행 사진을 찍는다는 상황 자체가 이미 블랙코미디의 교과서 같은 설정입니다. 중간에 사위(김영성)를 불러서 술을 먹여 재우는 장면, 프로레슬러 출신 셋째가 복면 쓰고 중고차를 사러 가는 장면, 경주 유적지에서 땅을 파다가 도굴꾼으로 오해받는 장면까지. 어떻게 비틀었느냐에 따라 전부 웃음 포인트가 될 수 있는 상황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들이 실제로는 너무 스무스하게 흘러가 버립니다. 예를 들어 도굴 오해 장면의 경우, 제가 기대했던 건 단속반과의 어색한 티키타카나 어처구니없는 오해의 전개였는데, 그냥 다음 컷에서 이미 도망가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 버리더라고요. 사전 빌드업 없이 결과만 보여주는 방식이라 웃음기가 생기질 않았습니다.
블랙코미디 장르의 성공 사례를 분석한 영화 연구에서도 이 장르는 '상황의 불협화음을 충분히 노출시키는 과정'이 핵심이라고 지적합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경주기행은 그 과정을 너무 빨리 지나쳐 버린 것 같습니다.
배우 연기만큼은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든 감정이 '안타깝다'였습니다. 그 이유가 배우들 때문이에요. 연기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연출의 빈자리가 더 크게 보였거든요.
이정은 씨의 연기는 제가 직접 스크린 앞에서 느낀 것인데,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8년이라는 세월을 버텨온 사람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엄마 옥실이 막내딸을 잃고 복수에만 집착하며 살아온 세월을, 대사 없이 눈빛과 호흡만으로 전달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진짜였습니다. 이건 제 취향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빼어난 퍼포먼스(performance)였습니다. 여기서 퍼포먼스란 단순히 대사 전달을 넘어, 인물의 내면 심리를 신체와 표정으로 구현해 내는 배우의 종합 연기력을 뜻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첫째 장주(공효진)와 본고차 앞에서 서로 맞붙는 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봤습니다. 공효진 씨가 두려움과 분노와 죄책감을 동시에 표정 하나에 담아내는데, 그 호흡 리듬이 너무 살아 있었어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내면적으로 변화하는 궤적이 가장 또렷하게 보인 장면이었습니다.
셋째 동주 역의 이연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항상 다혈질에 사고만 치는 캐릭터인데, 그 안에 막내의 수학여행 행선지를 경주로 밀어냈다는 죄책감이 얇게 깔려 있어요.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느껴지게 하는 연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박소담 씨의 영주도 법대 출신이지만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사람 특유의 날 선 방어성이 잘 살아 있었고요.
가족 관계성, 더 파고들었어야 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건 사실 후반부 추격전이 아닙니다. 가족의 관계성을 제대로 안 팠다는 거예요.
가족 서사(family narrative)란, 인물들 간의 감정적 긴장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이야기의 정서적 무게를 만들어 내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 영화에는 그 재료가 너무 풍부했습니다. 엄마는 막내를 잃은 뒤 복수에만 집착하며 살아남은 딸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첫째는 결혼해서 자기 가정을 꾸렸지만 이 계획을 어딘가 불편해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법고시를 포기한 채 가족의 눈치를 받으며 예민하게 반응하고, 셋째는 막내의 수학여행 행선지가 경주가 된 것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죄책감을 품고 있습니다.
이 관계망이 군데군데 드러나기는 하는데, 깊이가 없어요. 둘째가 짐을 싸서 나가려다 엄마의 편지를 보고 눈물 흘리며 돌아오는 장면은 제가 보기에 너무 전형적인 클리셰(cliché)였습니다. 클리셰란 이미 너무 많이 쓰여서 감동이 희석된 표현 방식을 뜻하는데, 이 장면이 딱 그랬습니다. 빌드업이 없으니 눈물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한국 범죄 드라마 연구에서도 '사적 제재(vigilante justice)'를 다룬 작품들이 성공하려면 복수의 행위 자체보다 그것을 선택하게 만든 인물 내면의 과정이 더 탄탄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사적 제재란 공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피해 당사자 혹은 그 주변인이 직접 정의를 실현하려는 행위를 뜻하는데, 경주기행이 다루려 한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살인범 백상현이 탈출하면서 영화가 갑자기 스릴러 장르로 돌변하는 후반부는 저로선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이 가족들이 경주라는 공간에서 서로의 상처를 꺼내 보이는 장면들을 더 넣었다면, 결말의 감정적 무게도 훨씬 달라졌을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경주기행 변요한 분량이 얼마나 되나요?
A. 변요한 씨는 노런티(no-credit) 출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인범 백상현 역할로 등장하는데, 전반부보다 중후반부에 비중이 집중되는 구조입니다. 제가 직접 봤을 때 후반부에 탈출 이후 비중이 확 늘어나면서 영화 톤 자체가 스릴러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Q. 경주기행이 블랙코미디 영화 맞나요? 무거운 영화인가요?
A. 블랙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블랙코미디의 유머 감각이 충분히 발휘되지는 않습니다. 초반부는 가볍게 볼 수 있는 분위기이나, 중반 이후 점점 무거워지고 후반부는 사실상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장르 톤이 꽤 많이 바뀌는 편입니다.
Q. 이정은 연기가 그렇게 좋다는 게 과장 아닌가요?
A. 과장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정은 씨를 조연 이미지로만 기억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완전한 주연으로서 장면 전체를 끌고 갑니다. 제가 직접 스크린에서 봤을 때 대사보다 표정과 호흡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들이 진짜였고, 공효진 씨와의 마지막 대립 신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몰입도가 높은 장면이었습니다.
Q. 결말이 어떻게 되나요? 복수는 성공하나요?
A. 스포일러를 최소화하면, 결말은 감독이 가장 전달하고 싶었던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기세 자체는 있습니다. 다만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설득력 있게 쌓이지 않아서, 감동이 온전히 전달되기보다는 아쉬움이 함께 남습니다.
결론
경주기행은 소재만 놓고 보면 정말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재라는 주제, 중의적 제목, 연기 잘하는 배우들, 가족 안에 쌓인 묘한 긴장감. 이 중 어느 하나만 제대로 파고들었어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보고 난 솔직한 감상은 "이도저도 아니다"였습니다. 블랙코미디, 가족 드라마, 범죄 스릴러를 동시에 잡으려다 어느 하나도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지 못했어요. 그나마 확실하게 건진 건 배우들의 연기였고, 그 연기가 오히려 연출의 빈자리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포텐셜이 있는 작품일수록 아쉬움도 큽니다. 이런 설정과 배우 조합이라면 다음 기회에 더 집중된 방향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극장 관람을 고민 중이라면, 배우들의 연기 자체를 목적으로 보러 가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입니다.